전체메뉴

호국영웅

  1. 호국영웅
  2. 호국영웅

전 구 서소위1927. 2. 27 ~ 1950. 10. 7

‘불굴의 보라매’ 영천 전투 승리의 주역

  • 저공비행으로 최대한 북한군에 가까이 다가가
  • 낡은 L-4 정찰기 조종으로 적 유도·괴멸에 큰 공
1950년 10월 7일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전구서 이등상사가 북한군이 숨어있는 강화도 화천군에 제1차 정찰 비행을 마치고 분대로 돌아왔다. 그는 또 다시 이륙 준비를 서둘렀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닦을 여유는 없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손잡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역공한 지 일주일 되던 날이었다. 북한군에 공격 기회를 찾기 위해 공군 정찰비행단이 화천군 곳곳에 지원을 나서야 했다.

잡초가 우거진 활주로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전 상사는 당시 제6사단 포병사령부 관측장교 전앙명 육군 소령과 함께 L-4 연락기에 몸을 실었다. L-4기는 조종석이 전후방으로된 2인승 연락용 경항공기다. 전 상사는 전투장비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이 연락기와 지난 한 달 동안 수차례 전쟁터를 누볐다.

연락기가 강화도 화천군 주변에 다다르자 북한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공포를 쏘아댔다. 전 상사는 뜻하지 않은 사격에 방향을 돌렸는데, 또 다른 북한군의 진지를 발견했다.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의 고지와 도로변에 2개 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전 상사와 전 소령은 북한군의 상공을 돌면서 관측 비행을 시작했다. 전 소령의 관측 유도로 한국군도 북한군에 포격을 가했다.

찰나의 순간, 북한군이 쏜 포탄에 연락기의 엔진이 맞았다.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전상사는 침착했다.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모든 기능을 잃은 연락기가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화천 저수지의 남쪽 10㎞ 산 중턱에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읍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에서 제2공립중학교까지 졸업했다. 18세가 되던 1945년 8월부터 조선항공협회의 조종사로 활동했다. 1948년 9월 육군항공기지사령부 항공병 제2기로 입대, 두 달 뒤 이등중사로 임관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구서 공군 소위는 공군 정찰대원으로 참전했다. 한 달 안에 남한을 장악하겠다는 북한군의 공세는 거셌다. 전 소위는 경북 영천 기지에 L-4 정찰비행부대 조종사로 한국군 제2군단 파견대로 남았다. 그는 북한군의 집중적인 포화 세례를 뚫고, 북한군의 이동 상황이나 공격 방향 등을 정확하게 알아냈다. 기상 정찰로는 위장한 북한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어려워 저공비행으로 최대한 북한군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포항과 기계 방면에서 북한군 2개 연대를 발견해 무찌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또 영천 보현산 남쪽에 몰래 공격 태세를 갖춘 북한군의 포병부대 소식을 한국군에 전하면서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꼽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