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길 영중위1930. 9. 22 ~ 1951. 9. 1
“중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고지는 우리가 점령하겠습니다.”
- 19살에 해병대 자원 입대 ··· 인천상륙작전서 정찰 임무 성공
- 김일성 고지 탈환 작전 중 적군 총탄에 맞아 전사
1951년 8월 강원도 홍천군에서 인제군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무거운 공기로 잔뜩 짓눌렸다. 완전 무장한 한국군 해병 제1연대와 미군 해병 제1사단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큰 비가 쏟아져 소양강이 넘치고 도로와 다리가 물에 잠겼다. 길을 훨씬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들의 눈빛은 강렬했다. 지난 보름 동안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뒤 승전보를 알렸다. 이 기세를 몰아 금강산 주요 봉우리 줄기를 경계를 뻗어나온 내금강의 북한군 본거지를 칠 생각이었다. 이 곳은 북한군 최강부대가 지키고 있는 곳으로, 가장 전술적 요지인 924고지-1026고지-1055고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924고지를 김일성 고지로, 1026고지를 모택동 고지로 불러 장병들의 사기와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강길영 소위가 있던 해병 제1연대 3대대 11중대는 김일성 고지의 오른쪽 후방을 맡았다. 9월 1일 오전 10시 30분 고지를 향해 총을 들었다. 예상과 달리 북한군의 수비는
견고했다. 긴장감이 흘렀다. 총알이 머리 위를 날아가고 포탄이 마구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밑에서는 지뢰가 터졌다.
그러나 11중대는 물러서지 않고 북한군이 있는 100m 앞까지 다가갔다. 그 순간, 강소위의 눈앞에서 육동욱 중위가 목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강 소위는 육 중위를 가슴에 안고 "중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고지는 반드시 우리가 점령하겠습니다"는 말과 함께 선두에 섰지만 그 말은 강 소위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북한군의 30m 앞까지 나아갔을 때 그는 북한군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향년 21세였다. 다음날 아침, 한국군은 승리의 깃발을 들었다.
경북 상주시 출신인 강길영 중위는 19세 되던 1949년 4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경남 창원시 진동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이 유래된 작전), 인천 상륙 작전(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작전), 서울탈환작전 등에 소총병으로 참전했다. 특히 그는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서 정찰대로 차출돼 북한군에 몰래 들어가 탐지하는 중요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1951년 3월 소위로 임관한 뒤 가리산 전투, 화천 지구 전투, 도솔산 지구 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부는 그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1953년 충무무공훈장과 해병 소위에서 중위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